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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6 담금질이 필요한 인생 (스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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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08-06 13:06 조회1,0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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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사건(478년) 20년 후 ‘제2차 포로귀환(458년)’이 있었다. 유대인 포로들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와 같은 제례 의식은 할 수가 없었다.


성전과 제사 중심에서 율법과 회당 중심으로 바뀌었다. 회당은 예배, 공부, 공동체의 장소가 되었다. 회당에서는 토라와 탈무드를 낭독하고 해석하며, 기도와 찬양을 드렸으며 공동체의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고 처리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사회적 중심이 되었다.


이 회당에는 제사장이 없고 랍비만 있었다. 랍비는 성직자가 아니라 학자로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했으며 많은 것을 알았기에 자연스럽게 유대인의 지역사회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제2차 포로귀환은 에스라가 인도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이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태어난 포로민 출신이었지만, 훌륭한 학자이자 제사장이었다.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자문을 맡았으며, 왕의 존경을 받았다.


에스라는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 아닥사스다 왕에게 간청해 귀환을 허락받는다. 2천여 명의 유대인들과 함께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 4~5개월 동안 걸어서 돌아왔다. 이때, 성전 기금 모금, 국고 보조금, 성전 물품 사용, 제사장과 레위인의 세금 면제, 재판 권한 등을 부여받았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신앙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모세오경을 가르치고, 포로귀환 역사를 집필하며, 이방인과 결혼한 부부를 갈라놓으며,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에스라는 유대인들이 이방신을 섬기지 않도록 금한 율법을 강조하고, 안식일과 축제를 준수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유대교의 성경적 기초와 법적 전통을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차 귀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의 공로가 ‘성전 재건’이라면, 2차 귀환 지도자인 에스라의 공로는 ‘신앙개혁’이다. 1차 귀환 때 5만여 명의 백성들이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고 2차 귀환 때 2천여 명의 백성들이 돌아와 신앙개혁과 회개 운동으로 무너진 신앙생활을 다시 세웠다.


에스라는 아버지가 아론 가문의 제사장으로 1차 포로귀환 때 돌아가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바벨론에서는 에스더 사건인 유대인 대학살의 위기도 겪었다. 타국에서 인종차별을 받으며 보수적 신앙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며 많은 갈등과 번민을 겪었을 것이다. 이러한 크고 작은 일들을 겪었지만 신앙이 견고한 청년이자 인정받는 학자가 되었다.


이것은 ‘나무의 인생’에 비유할 수 있다. 나무는 큰 나무 작은 나무 가릴 것 없이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어 싹이 튼다 해도 몇 해 동안 자라지 않는다. 생장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뿌리에 힘을 쏟으며 살아남을 힘을 비축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유형기’를 지나면 어떠한 외부 요인에도 굳건히 버티는 성목이 된다.


우리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지도자를 길러내야 한다는 비전을 갖고 세워진 교회다.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 인생에 좋은 일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값지고 귀한 것을 얻으려면 담금질이 필요하다. 지도자를 길러내는 것도 이와 같다. 힘들고 답답한 담금질 시간이 진정한 영적 지도자를 만들어 낸다. 이것을 잊지 말고 진정한 영적 지도자들을 대거 배출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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